Past
윤종석 기획초대 개인전
표면의 깊이
THE DEEP SURFACE
2021. 4. 15(목) - 5. 22(토)
(매주 일/월요일, 공휴일 휴관)
윤종석, 수도자의 마음으로 점을 찍다
글_김윤섭(아이프아트매니지먼트 대표)ㆍ김나리(호리아트스페이스 대표)
인생에서 50대는 가장 중요한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100세 시대의 전환점이기도 하지만, 인생의 무게와 책무를 따져보아도 가장 화려하면서도 불안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묵묵히 예술가의 길을 걸어온 창작자에게도 50대는 결코 녹록치 않은 설렘과 충족감이 교차하는 시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적 고민의 깊이와 신중함이 충만한 50대 예술가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이번 윤종석 작가의 기획초대전 역시 기대 이상의 설렘을 선사하리라 기대합니다.
윤종석 작가는 ‘주사기 작가’로 통합니다. 말 그대로 바늘을 제거한 주사기통에 물감을 넣어 그림을 그리기 때문입니다. 간혹 그림을 그리는 방법이 그 작가의 경쟁력이 됩니다. 아주 획기적인 재료를 선택하거나, 평범한 재료를 비범하게 사용하면서 차별화를 꾀합니다. 윤 작가의 경우엔 후자에 속합니다. 회화 작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지만, 그 결과물은 완전히 색다른 신선함을 선사합니다. 정교하고 치밀함이 압권이며, 수만 번의 터치가 축적된 흔적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윤 작가는 “주변을 들여다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채집하듯 기억을 기록한다. 이것들이 모이면 어제의 오늘을 통해 내일의 오늘을 볼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은 스치는 ‘자신의 날들’인 일상을 기록하고 채집한 결과물들입니다. 매일매일 보는 것들 중에서 남겨두고 싶은 이미지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특별한 감흥을 전하는 것들을 회화나 드로잉으로 옮깁니다. 무심결의 수많은 시간과 피사체의 잔상들을 깨알보다 작은 점들로 중첩시켜 재창조해냅니다. 그의 작업은 ‘찰나의 존귀함’을 보여줍니다. 촘촘히 잘 짜였으면서도 본능적인 자유로움이 공존합니다.
주사기를 활용하는 윤종석은 한 번의 손짓(붓질)으로 단 하나의 점만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웬만한 크기의 작품 한 점을 완성하려면 수십만 개 이상의 점을 찍는 게 보통입니다. 스스로 선택한 고행의 방법입니다. 마치 수도자의 자세로 작품에 임하듯, 게으름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정직한 노동의 대가로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작가적 자세와 신념에 박수를 보냅니다.
“최근의 작업은 수없이 많은 일상의 사물과 관계 속에서 무의식이든 의식적이든, 어떤 소재나 상황에 반응하는지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됐다. 이때 선별한 이미지들과 연결된 역사적 시간을 추적하고 채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선택된 이미지들이 현재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고, 그 과거가 미래에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는가를 찾아본다. 켜켜이 쌓여진 과거를 밟고 살아가는 현재의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은 마치 여러 단계의 질문을 풀어가며 자신의 내면심리를 알아가는 일종의 심리테스트와도 같다.”
작가의 말처럼 윤종석의 이번 신작들은 ‘현재의 내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나누는 심리게임’과도 같습니다. 여전히 주사기를 활용해 일일이 수만 개의 점찍기를 반복합니다. 특히 2020년 이후의 신작들엔 남다른 짜임새의 깊이가 돋보입니다. 작품제목의 괄호에 써진 숫자에 비밀이 담겼으며,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윤 작가는 평소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흥미로운 이미지를 발견하면, 그 소재에 대해 추가로 검색해 알아갑니다. 검색한 같은 날짜의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을 추가로 검색하다가 주목되는 3~4개의 이미지를 선별한 후, 그 중에 1~2개 이미지를 처음 시작점에서 흥미를 끌었던 소재와 연결시켜 작가만의 창의적인 이야기로 재해석해 완성하는 형식입니다.
예를 들어 작품 <구도자(1104)>에선 흰 소가 연꽃 봉오리를 뿔에 매달고 있습니다. 이 역시 어느 날(11월4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소를 키우는 모습을 만났습니다. 소와 함께 살며 소의 오줌으로 머리를 감을 정도로 신성시 여기는 모습에서 묘한 울림을 받았습니다.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TV를 시청한 같은 날짜의 과거기록에 마침 성철스님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이쯤 되면 자연스럽게 심우도(尋牛圖)가 떠오르고, 인간의 본성을 찾아가는 구도과정을 신령스러운 흰 소에 비유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매달린 분홍빛 연꽃이 우리가 좇는 이상향으로 보입니다.
작품 중엔 어린 조카로 인해 얻은 교훈을 작품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작품 <내일을 위한 기념비(1212)>가 그 경우입니다. 조카에게 장난감을 사주러 마트에 들렀습니다. 조카의 손에 든 레고블럭을 보며, 저 작은 조각 하나로 별스런 세상을 다 만드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날도 때마침 인터넷을 뒤졌습니다. 이 날은 유독 전쟁에 관한 사건들이 많았고, 반대로 학문적인 성과에 대한 에피소드도 많았습니다. 서로 상반된 두 이미지(총알과 펜촉)와 레고블럭 한 조각의 만남! 아주 작은 한 조각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세상의 모습은 당사자인 우리가 하기 나름이겠다 싶은 교훈으로 작품을 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윤종석 작가는 스스로 게으름을 경계하며 노동집약적인 화법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의 작가적 신념에서 그림이 지닌 숭고함을 읽게 됩니다. 비록 개인의 경험과 감성을 옮긴 작품일지라도, 수많은 관람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 그림의 힘이라 믿습니다. 전시제목으로 내세운 “표면의 깊이”는 바로 그러한 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겉만 봐선 깊은 속을 알 수 없습니다. 밤하늘 은하수의 물결이 우주의 깊이를 전해주듯, 화면 위에 깨알처럼 내려앉은 수많은 점들은 윤 작가가 그려내는 예술적 영감의 깊이를 감싸고 있습니다. 가장 기본에 충실한 윤종석의 작품세계를 소개할 수 있어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 주최: 호리아트스페이스
* 기획: 아이프aifceo김윤섭
* 후원: 원메딕스인더스트리